모리스갤러리-홍빛나전-빛이내린 품-레이디타임즈
홍빛나 展-빛이 내린 품
모리스갤러리/6.23(목)~29(수)/ T.042-867-7009
자욱하게 핀 작약 위에서 새하얗게 행복한 달항아리를 품고 있는 새 한 마리가 커다란 눈동자에 담겨 있다. 태양은 온통 꽃에 집중하고 일순간 멈춘 바람은 고요한 귓가를 간지럼 태운다. 부드러운 필치로 피어난 꽃은 빛으로 더욱 찬란하고 이로써 획득한 투명함은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화면 가득히 분주하다. 충만한 생명력은 건강하기 이를 데 없고, 그 생명에서 우리는 찬란한 아침의 침묵을 경험한다. 새는 이내 다른 곳으로 날아가 소녀와 꽃을 나누고 또 즐긴다. 그리고 새가 떠난 빈자리에는 바람이 조각한 구름이 밀려와 꽃을, 나무를 감돈다.
지난날의 새는 공포 그 자체로서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작가는 소녀로 등장하여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무작정 싫어했던 일방적인 미움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하기 위해 새와 친교를 나누었다. 때로는 장난스럽게 때로는 사랑스럽게 어루만지고 쓰다듬는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다정한 관계를 구현하는 과정 동안 작가의 내면은 고투에 가까웠다. 의식을 짓누르는 공포의 대상을 직시하고 애정 어린 마음을 담아내기까지 혼자서 벌인 반복적인 싸움은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고독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끝에서 공포로부터 해방된 소녀는 이제 평온한 마음의 경계 안으로 새를 들여놓았다. 화해의 순간을 사는 새는 이제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고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상처를 치유하게 한다.’ 그리고 영혼에 야기된 공포를 이겨낸 작가는 ‘새와 함께 멀리멀리 날고 싶을’ 만큼 기쁨의 상태를 만끽하고, ‘내가 나를 사랑하게 한다’고 말할 만큼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한다.
과거의 달은 달항아리 형상으로 뜰 곳곳에 등장한다. 먼 곳에 두고 그리워하던 달은 작가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달을, 달항아리를 바다에서 건져 올리고 품에 앉고 공간에 띄워도 본다. 사실 달은 열어젖힌 검은 세상, 막연하게 이어진 길에서 만난 아버지의 위로다. “내가 다시 돌아갈 곳은 달이야!” 어린 시설 들었던 전설 같은 아버지의 읊조림은 달을 꿈으로 고향으로 의미화하였다. 그리고 결국 혼자 살다가 혼자 죽는 삶의 여정을 깨우치는 순간에 찾아드는 내면의 동요로부터 지켜주는 비밀스러운 힘이 되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왔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달은 고독한 삶의 여정을 함께 걸으며 불안한 감각을 다독이고, 벅찬 순간의 곁을 증언한다. 달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달은 필요하다.
달항아리의 축복 아래 작약 한 다발을 든 소녀가 있다. 소녀는 새와 꽃을 나누기도 하고 새와 꽃 더미 속에서 놀이하거나 새가 지켜보는 숲에 수줍게 서 있다. 소녀의 얼굴에 가득한 행복은 순수하다. 소녀는 마치 행복으로 충만한 그 모습 자체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는 듯하다. 도저히 깨울 수 없는 사랑스러운 도취는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작가의 전작에서 소녀는 세상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능동적 실천자였지만 이곳의 소녀는 세상에 대해 안내할 게 많은 5살 어린아이다. 작가의 딸과 동년배인 이 아이에게만큼은 세상의 어둠보다 빛이 먼저 닿을 수 있기를 염원한다. 작가는 어린 시절 새가 불러들였던 공포에 휩싸였고 벗어나기 위해 보냈던 고통의 시간을 기억한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에 발을 딛는 순간이 주는 두려움과 설렘을 내면의 파동을 일으키며 한데 엉켜 있던 심리적, 정신적 상태를 기억한다. 어차피 삶의 어둠을 영원히 모르고 살아가기란 불정신적 상태를 기억한다. 어차피 삶의 어둠을 영원히 모르고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지만 공포를 떨치는 노력보다 삶의 환희를 먼저 느낄 수 있다면, 그래서 투쟁보다는 조화를 먼저 깨우칠 수 있다면…….
꽃은 만개 후 이내 시들어 떨어지고 달은 차오르면 기울어지게 마련이다. 작가는 이 불완전한 시간 속에 휩쓸려 가는 생명을 들춰내는 대신 생명의 충만함으로 불안감을 진정시키고 완벽한 세상을 구현하고자 한다. 작가의 사유는 무겁고 어두운 곳으로 향해 가지만 이 고난의 과정을 통해 드러낸 세상은 더없이 밝고 고요하며 화창하다. 그동안 마음속의 소용돌이를 잠재우기 위해 ‘나를 사랑해주는 것, 나부터 사랑해주는 모습’을 실현하는 행위자로 존재했다면 이제 작가는 의식으로 현실을 변형하고 이를 즉각적으로 화폭에 반영함으로써 자신이 보고 싶은, 보여주고 싶은 세상을 적극적으로 투영하는 창출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마음만큼 순수하고, 눈동자만큼 맑고 평화로운 세상을 창출하는 데에 집중한다. 결과는 곧 두려움 없이 영위할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미적 형상화의 궁극적 대상으로서 탄생한다. 작가의 손끝에서 태어난 세상은 결국 염려를 사랑으로 의미화한 자연이고 누군가를 하염없이 보호하고 싶은 어미의 세상이며 ‘너와 내가 비로소 만나 꽃을 피울 수 있는’ 어미의 품이다.
이보경(독립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