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책 어떠세요

오긍의 <정관정요>

레이디타임즈 2013. 3. 25. 16:02

임영호의 독서일기

리더쉽의 영원한 고전 '정관정요'

임영호  |  18대 국회의원


「정관정요」, 책 두께로 나를 압도한다. 진작 읽었어야 할 책이다. 작건 크건 한 조직의 장이라면 이 책을 읽고 마음에 새기면 조직을 더 잘 이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역대 중국 역사에서 가장 큰 제국인 당나라, 그 중에서도 태평성대를 이룬 당태종 정관의 치 (貞觀의 治) 시기에 이루어진 사실을 담은 책이다. 사관 오긍(吳兢)이 당태종이 죽은 후 측천무후 (則天武后)의 악행을 목격하고 교육적 목적으로 지어서 왕께 헌정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이 당태종을 성군으로 만들었는지 하나하나 풀숲을 헤치듯이 살폈다. 창업자 고조 이연 (高祖 李淵)이 수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를 세우는 과정에 그 곁에서 도왔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조선의 태종처럼 형제를 죽인 그가 어떤 마음과 자세로 나라를 이끌었는지 알고 싶었다.


첫째는 백성을 가장 중요시하는 정치철학 이다.한마디로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뒤엎을 수도 있다.”라는 말에 답이 있다. 그는 신하들에게 말한다. “군주로서의 도리는 반드시 먼저 백성을 아끼고 가엾게 여겨 이를 보살피는 것이다. 만약 백성을 괴롭히면서 자기 몸을 받들고자 함은 마치 자신의 넓적다리를 떼여 배를 채움과 같다. 배는 부르면서 쓰러진다.”


당태종이 백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름 할 수 있는 한 예가 있다. 당태종 2년 수도 장안 부근에 큰 가뭄에다가 농작물 해충인 누리가 많이 발생하였다. 태종이 시찰하다가 두 손으로 누리 몇 마리를 잡고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곡물로 목숨을 보존한다. 이것들은 백성들을 해치는 벌레이다. 그 책임은 나 한사람에게 있다. 당연히 나의 심장을 먹어야지 백성들을 해롭게 할 수는 없다.”그리고 그것을 삼키려 했다. 산하들은 이것을 삼키면 병이 나실 것이라고 반대했다. “내 바람은 나 자신에게 재앙을 옮기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질병을 피하겠냐?” 하며 누리를 집어 삼켰다. 절대 군주의 생각이 이러하기에 당나라는 최강국이 되었고 태종은 최고의 군주로 칭송 되었다.


두 번째는 태종의 경영원칙이다. 그는 기본에 충실하다. 먼저 백성을 제일로 여기는 맹자의 민본주의 원칙에 의거 백성들이 좋아하는 일들을 한다. 또한 황제 자신이 모범을 보여 자연스럽게 백성들을 교화하여 억지로 다스리지 않아도, 힘을 다 쓰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지게 하는 무위지치(無爲之治) 즉 덕치를 상책으로 삼는다. 일체의 인위적 규제를 반대하는 노자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태종은 “하천의 맑고 흐림은 그 원인이 수원(水源)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며, “군주는 정치의 근원이요, 만민은 바로 물의 흐름과 같은 것이다.”고 말하자 신하 위징은 이에 “군주 자신이 품행이 단정한데 나라가 안정되지 못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고 말한다. 군주와 신하가 서로 이정도이니 감히 누가 허튼짓을 하겠나.


「정관정요」에 나타난 태종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그는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선발해 어진 군주가 되려고 노력했고, 허심탄회하게 간언을 받아들여 자신의 잘못된 행실을 바로잡으려 했으며, 부역과 세금을 가볍게 해 백성들을 아꼈고, 형법을 신중하고 가볍게 사용하였으며, 문화를 중시해 풍속을 좋게 바꾸고, 농업을 근본으로 삼아 백성들이 전쟁이나 부역으로 인해 농사철을 놓치지 않도록 했으며, 군주와 신하가 서로 거울이 되어 시종여일 선행을 하려했고, 근면하고 검소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군주가 그러한데 관리와 백성들도 청렴하게 생활하고 근신했다. 왕족이나 왕비의 집안, 세력이 있는 가문이나 간사한 무리도 통제 되었다. 천하가 위아래로 다스려졌기 때문에 감옥이 텅텅 비었다.


위징은 태종에게 백성들의 원한을 부르는 것은 일의 크기에 달려있지 않고 민심에 달려있음을 간언한다. 따라서 썩은 새끼줄로 수레를 매고서 달리듯 위험하니 매사 신중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과거 수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30여년 간 강한 군사력의 위세가 일만 리 까지 퍼졌고, 먼 곳의 다른 나라까지 진동 시켰지만, 하루아침에 멸망한 이유를 조목조목 말했다.천하의 백성들을 몰아세워 모든 일을 자기 욕심대로 처리하고, 소유하고 있던 재물을 전부 소모하면서까지 향락을 누리고, 천하의 미녀를 선발해 궁궐로 불러들이고, 먼 곳에서 생산되는 진귀한 보물을 거둬들였다. 군주가 궁궐 정원의 화려한 장식과 정자와 누각의 웅장한 장관을 추구했기 때문에 징발과 부역은 끝이 없었고 자주 전쟁을 일으켜 병사들을 동원하는 것 또한 그치지 않았다. 겉으로는 분명 장중한 위엄이 있지만, 속은 간사함과 기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참언과 사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반드시 복을 받지만, 충성스럽고 정직한 사람은 자기 목숨도 부지할 수 없었다.


세 번째 태종은 침묵이 독이 된다는 것을 알고 간언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집권초기 신하들이 자기의 뜻에 무조건 영합하여 받아들이는 것을 질책한다. 황제가 내린 조서도 부당하여 실행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반드시 자기의견을 견지하도록 독려한다. 바른말을 솔직하게 간언하면 나라의 정치에 도움을 주니 자기 뜻에 거스른다고 해도 마음대로 벌주거나 질책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한다.


“대체 신하로서 왕에게 답할 경우 대개 군주의 기분에 맞추어 거슬림이 없도록 아첨을 늘어놓아 마음에 들도록 하고 있다. 나는 지금 나의 과실에 대하여 듣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다 주저하지 말고 생각한 바를 말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신하가 대답하였다. “폐하께서 공경들과 어떤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시거나, 의견을 상소하는 자가 있을 때마다 폐하의 뜻에 맞지 않으신다고, 때에 따라서는 그의 면전에서 의논이나 상소의 내용에 대하여 힐문을 가(加)하십니다. 그래서 신하들은 부끄러워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아마도 신하들의 직언을 유도하시는 방법이 아닌 줄로 압니다.” 이 말을 듣고 태종은 “나도 그렇게 힐문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그대의 말은 지극히 당연하다. 꼭 그대를 위해 이러한 결점을 고치도록 하겠다.” 말한다.


당태종이 훌륭한 정치를 하는데 그중 위징(魏徵)의 간언이 크게 기여한다. 바른말 일지라도 군주의 역린(逆鱗)에 해당되면 목숨까지 위태로운 것이 간언이다. 그러나 이것저것 가리거나 직설적이며 가슴을 후벼 파는 간언이 아니라면 군주라는 지위에서는 마음에 와 닿지 않아 고쳐 지지 않는다.위징은 위험천만하고 준엄하게 300여회나 되는 간언을 하였고, 당태종이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하였으나 반드시 안색을 부드럽게 하여 편하게 해주었다. 더군다나 위징은 물론이고 어느 누구든지 좋은 건의는 주저 없이 받아들이면서 그때마다 반드시 크게 포상했다. 사실 위징은 자기와 왕권을 다투었던 태자이면서 형인 이건성의 부하였다. 당시 위징은 태자에게 후에 태종이 되는 동생 이세민을 죽이라고 간언한다. 당태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조선의 사간원 대제학에 해당되는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중용한다. 나중에는 태종의 비서감까지 하면서 옆에서 도왔고 그는 항상 위징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를 묻는다.고구려와의 전쟁도 위징의 사후에 일어난 것으로 안시성싸움에서 사실상 패배 후 물러나면서 그가 있었으면 반대했을 거라며 아쉬워했다.


네 번째는 당태종은 어질고 현명한 신하를 곁에 두었다.공자가 ‛천장의 양가죽이 여우 겨드랑이 털 하나만 못하다’라고 말했듯이 현명하고 능력 있는 인재가 조정에는 필요하다. 일찍이 위나라 조조(曹操)가 인재를 천하에서 얻기 위하여 구현량(求賢良)이라는 칙령을 내렸듯이 인재를 얻는다는 것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힘든 일이다. 어진 신하를 알아보는 것도 군주의 몫이고 그것을 버리는 것도 군주이다. 당태종 때 자기 몸처럼 사랑했고 존경했던 부하는 여덟 명이다. 이들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난 것을 기뻐하며 태종을 위하여 전심전력 일을 한다. 군주가 근심을 하면 신하는 그것을 자신의 치욕으로 생각하고 군주가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음으로써 그것을 씻는다는 각오로 일했다. 적군을 평정하면 남들은 금은보화를 탐내지만 그들은 적군의 성안에 있는 우수한 인재를 찾아내서 태종에 있는 진영에 보내고, 한 치의 실수 없이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또한 한가할 때는 임금과 지난날의 정치를 평하고 임금이 옳게 말하면 기뻐하고 한마디라도 옳지 않게 말하면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어느 날 위징은 태종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며 말한다. “저는 목숨을 나라를 위하여 바쳐 어디까지나 바른길을 행하고자 합니다. 다만 아무쪼록 저를 양신(良臣)으로 만들어 주시길 바랄뿐 저를 충신(忠臣)으로 만들려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에 태종이 묻는다. “충신과 양신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위징이 대답한다. “양신(良臣)은 그 자신이 후세에 추앙(推仰)되는 훌륭한 이름을 얻고, 군주에게는 거룩한 천자라는 훌륭한 칭호를 받도록 하며, 자손 대대로 그 가계(家系)가 이어져 끊이지 않아 그 행복은 한량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충신(忠臣)은 그 자신은 물론이요 그 일족이 모두 몰살을 당하고, 그 군주는 폭군으로 떨어지고 국가도 가문도 다 멸망하여, 나만 충신이었다는 이름만이 후세에 남게 됩니다.”조선의 세종과 황희정승, 백제의 의자왕과 계백장군을 연상하게 하는 말이다.


이에 보답하는 태종의 부하사랑도 대단했다. 헌신하는 신하를 자기 몸보다 더 아꼈다. 이적(李勣)이라는 신하가 중병에 걸리자 의사의 처방이 구레나룻 수염으로 만든 재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하자 태종은 이적을 위하여 직접 자기 구레나룻 수염을 잘라 만든 재로 약을 만들었고, 우세남(虞世南)이 죽자 자기가 업무를 보는 편전에 제사를 모셨으며, 위징(魏徵)이 변변한 집이 없는 것을 알고 태종은 마침 궁에 작은 어전을 지으려고 한 것을 그만두고 그 어전 지을 목재로 위징에게 집을 지어 주었다. 노자의 도덕경에 “빼앗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 한다.”구절이 쓰여 있다. 절대 배신하지 않는 충복은 이렇게 만들어 지는 것 같다.


끝으로 사관 오긍이 「정관정요」를 편찬한 동기는 태종의 그 시절을 그리워함이다. 태종의 후궁이었던 측천무후의 전횡과 관련이 있다. 그녀는 태종을 이은 고종의 총애를 받고 나중에 왕후까지 되었으며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가 되었다. 평화가 지속되면 마음이 교만하고 음란해져 나라가 쇠락해진다하여 수성의 어려움을 말한 위징의 경고가 어쩌면 이렇게 자연의 법칙처럼 들어맞을까?


「정관정요」는 오늘날까지 제왕의 통치철학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역대의 어느 왕이든 현명한 군주가 되려는 욕심이 있다면 이 책을 읽었다. 당나라 선종은 병풍을 만들고 금나라 세종은 각본으로 펴내 옆에 두고 읽었으며, 청나라 고종 건륭제는 애독하여 이와 관련 된 시와 글을 지었다. 조선 세종대왕의 하나하나의 언행과 치적을 보면 세종은 수백 번도 더 읽었을 것 같다.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도 애독하여 일본의 통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한다.


소통의 리더십이 강조되는 오늘날, 제왕적 권위보다도 참모들의 말을 귀담아 들은 당태종의 열린 정치는 시대를 떠나 본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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