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문득...

은행나무를 겁주는 사람

레이디타임즈 2012. 12. 17. 08:48

 환경청이 주관하는 팸투어에 동행 취재를 하게 되었다. 취재도 취재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부여의 백마강에서 황포돗배를 타고 고란사로 가는 일정이 포함되어 있어 부푼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나를 선두로 45인승 버스에는 하나 둘씩 동행할 사람들이 올라탔다. 모두가 낯선 얼굴들이어서 아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연신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펄쩍 뛰어 오를 만큼 반가운 얼굴이 버스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었다. 바로 신혼시절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었다.

 의외의 장소에서 우연처럼 이루어지는 만남은 영화 속에서나 펼쳐지는 광경이 아니었다. 지금도 가끔은 그리워지는 얼굴 중엔 목사님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어찌나 반갑던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내게는 친정아버지처럼 자상한 모습으로 막내딸 고자질하듯 고하는 얘기들을 귀담아 들어 주시고 기도로 다독여 주시던 분이 바로 목사님이셨다. 

목사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그날 팸투어는 더욱 즐거운 여정이 되었다. 팸투어의 마지막 일정인 고대하던 황포돗배를 타고 백마강을 거슬러 고란사로 향하면서 배안에서 목사님과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안부도 기억나는 대로 여쭤도 보고 교회 앞마당에 심겨진 은행이 두가마니도 넘게 달리던 은행나무의 안부까지 물었다. 목사님은 연신 물어대는 나의 질문에 귀찮은 기색은커녕 신바람이 나셨다. 그리고는 내가 이사 간 후에 벌어졌던 일들과 그곳 사람들의 소식을 재미있게 전해 주셨다. 그리고 은행나무는 아직도 교회 앞마당에 늠름하게 잘 있다고 안부를 전하시면서 은행나무와 관련되어 벌어진 재미있는 일도 들려주셨다. 

“그렇게 잘 달리던 은행나무가 몇해째 열매가 열리지 않아서 베어 버리려고 했는데 동네 어르신들이 톱을 들고 베어버리는 척을 하면서 겁을 주면 다시 은행이 열리는 수가 있다고 해서 호통에 호통을 쳤는데 내년엔 열매가 많이 달리려나 내심 기대하고 있는데 어찌 될지 모르겠어.”

 황포돗배를 타고 고란사와 낙화암까지를 끝으로 팸투어는 끝이 났다. 목사님과 헤어져 집으로도 돌아와서도 목사님께 전해 들었던 은행나무 이야기는 머릿속을 맴돌며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겁을 주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많은 생각들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때론 내가 감당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 지치고 피곤할 때, 감당할 짐들을 십리만리 내던지고 주저앉고 싶은 순간이 있다. 이런 순간, 열매 없는 은행나무를 향해 ‘베어버리겠다’고 엄포를 주듯 ‘정신 차리고 일어나라’고 천둥 같은 호통을 치며 겁을 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벼락같은 호통에 오줌지리도록 겁이 나 다시금 마음을 정립하고 가던 길을 달려가다 보면 먼 훗날, 실한 열매 한 두 개쯤 매달고 있을 테니까.

 내년 가을엔 목사님의 호령으로 잔뜩 겁이 난 은행나무가 주렁주렁 많은 열매를 매달고 가을바람에 노란 은행잎을 승리에 깃발처럼 나플거리면 좋겠다. 가만히 잠자리에 누워 은행나무를 향해 겁을 주는 목사님의 모습을 떠올리자니 웃음보가 터졌는지 웃음이 그치질 않는다.

'어느날 문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신감을 테스트 하라  (0) 2012.12.21
참새 날개로 날기  (0) 2012.12.17
안녕하세요 9층~  (0) 2012.10.06
영혼의 온도  (0) 2012.10.06
가면놀이는 끝났다  (0) 2012.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