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문득...

산책하는 여자

레이디타임즈 2012. 10. 6. 07:34

오전 11시의 공원은 한적하기 그지없다. 파란 잔디 위로 까만 연미복 차림의 까치만이 강종거리는 이 공원의 한적함을 난 사랑한다. 눈가의 주름을 감추고 싶어도 감출 수 없는 나이.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고 싶은 생각이 들 때면 서둘러 공원으로 산책을 나선다.


사내아이의 길어진 머릴 깎듯 잘 깎여진 잔디의 풀내음은 동심으로 나를 이끈다. 어린 시절, 천둥벌거숭이 되어 앞산 숲에서 숨바꼭질 참 많이도 했었다. 녹음 짙던 그 숲에는 봄부터 여름까지 나리꽃이 지천으로 피었었다. 


주근깨가 송송 박힌 홍시빛 꽃잎 위로 밤색 꽃술이 대롱대던 나리꽃들. 그 향기가 좋아 꽃 속에 코를 박고 숨 막히도록 향기를 맡았었다. 나리꽃의 밤색 꽃가루 때문에 바둑이 코가 된 나를 보고 배꼽 빠지게 웃던 소꿉동무들의 때까치 소리 같던 웃음소리도 들려오는 것만 같다. 


늘씬한 여자의 몸처럼 길게 누운 굽이 길을 돌아서니 붉은 봉숭아꽃이 만발하다. 노을지듯 손톱을 물들이던 봉숭아 꽃물이 내 생애 최초 멋부림의 시작이었다. 웃자란 쑥을 단으로 묶어 모기불을 피우고 평상에 누워 별을 헤던 여름밤. 매캐한 모기불과 잠에 겨워 눈이 감기면 할머니는 고사리 같은 내 손을 당신 무릎에 얹으시고 짓찧어진 봉숭아꽃을 손톱 위에 올리고 호박잎으로 꼭꼭 싸매 주셨다.


 ‘나이만 집어먹고 눈은 자꾸 침침해 진다’며 푸념 섞인 혼잣말을 되뇌시던 할머니. 언제부턴지 책을 눈에서 멀리 떼어 놓고 보아야 읽을 수 있는 지금에 와서야 할머니의 심정을 알 것 같다. 눈이 어두웠던 할머니는 보이지 않던 행복을 보실 줄 아는 마음의 시력은 밝은 분이셨다. 마당에 살포시 눈이 쌓이면 아무도 밟지 않은 백설기 같은 흰 눈 위에 고무신 자국을 꽃같이 돌려 찍고 ‘마당에 꽃피었다’고 나를 깨우시던 할머니. 보이지 않는 행복을 찾아내던 그 분의 시력을 내 눈에도 담고 싶다.


추억과 도란도란 대화가 오가는 나만의 산책하는 시간. 발밑에 깔린 까만 자갈돌들이 자그락! 자그락! 듣고 있다 기척이다. 지나는 발길에 밟혀 뾰족뾰족한 자갈돌들은 언제일진 모르지만 조약돌처럼 동글동글 예뻐질 것이다. 예민함을 핑계 삼아 걸핏하면 부리던 뾰족한 성깔도 오십년 동안 날 따라온 시간의 발길에 밟혀 조약돌 비슷하게 되어간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더 보탠다면 아직도 가끔씩 죽순 솟듯 올라오는 뾰족한 성깔도 동글동글 예쁜 조약돌이 되어갈까. 오던 길을 되돌아서니 연미복 차림의 까치가 저만치 강종거리며 앞장서 걷고 있다.
아줌마란 꼬리표를 달고부터 타인과의 수다에는 열성이지만 정작 자신과의 대화는 재미없는 책장 넘기듯 미루고 미뤄버린 게으른 유보. 갑자기 무엇인가에 놀란 듯 까치가 푸드득 날아오른다. 그 순간 게으르게 뒹굴던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까치의 날개 짓에 놀라 화들짝 깨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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